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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망가지고 있다.

골드비 2021. 11. 25.

페미니즘

한국에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반발 역시 강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여성들은 여전히 여자들이 살기 불합리한 차별받는 세상이라고 외치고 싶은데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군대. 집 장만, 외벌이 등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의 댓글을 보면 약간만 성별논쟁이 될 수 있는 떡밥이다 싶으면  남녀 사이의 신랄한 비난과 논쟁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치권 역시 페미니즘을 의식하여 여러 정책들을 내놓고 있거나 언급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페미니즘의 역사는 매우 깊고 다양한데 이 깊고도 다양한 담론을 하나의 뽀죡한 창을 만들어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됬는지 시초부터 거칠게 나누어 짐작해 볼 수는 있는데 

 

시작은 18세기 19세기 무렵(더 뒤로 거슬러 가는 이론도 있으나 너무 과거이므로) 여성인권이 열악했을 페미니즘 초기 무렵 페미니스트들은  무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싸웠다. 그렇다. 그 당시에는 천부인권과 평등권이 주창되던 계몽주의 시대였음에도 여성은 투표할 권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페미니즘은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당연한 권리의 주창일 것이다. 

 

당시 장 자크 루소는 계몽 시대의 남성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에밀>에서 "여성은 남성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남성은 가정에서 여성의 뜻에 따르는 대신에, 사회에서는 강자 행세를 하게 된다. 남성은 이성에 따라 스스로 성욕을 억제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여 정숙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자크 루소가 현대에는 천부인권 사상을 다진 역사적 위인으로  평가받지만 당시 가장 급진적 사상을 가졌을 그가 정작 현대의 관점에서 남성우월주의자였던 것이다. 그 당시 여성인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참정권과 백인 남성들과의 동등한 권리 주장, 천부인권에 여성도 포함. 여기까지는 현대사회에서도 별 문제없이 받아들일만한데 1세대 페미니즘부터 4세대 페미니즘까지 발전하면서 페미니즘이 분화되기 시작하고 페미니즘도 여러 가지 양상을 띄게 된다. 그에 따른 반발과 갈등도 심화된다.

 

페미니즘은 범위가 매우 넓으며 폭넓은 사상답게 수많은 분파가 있어 페미니즘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서로 공유하는 이론도 있고 공유하지 않는 이론도 있기 때문에 특정 분파의 이론이라고 독자적이라고 볼 수 없고 다양한 범위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페미니즘 분파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등 수많은 분파들이 있는데 여기서 주로 문제 되는 부분은 래디컬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의 분파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니까 한국 페미니즘의 문제는 한국의 페미니즘이 래디컬 페미니즘으로만 비춰지고 워마드, 메갈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페미니즘이 정작 여성들에게 비판받지 않는 것에 있다.

 

 만약 남성들은 내 근처의 누군가가 일베를 하고 있고 일베에서 계급이 매우 높고 세월호가 어쩌니 홍어가 어쩌니 하는 말을 지껄이면 매우 이상하게 보고 피하거나 비난할 확률이 높은데 워마드나 메갈이 하는 행위는 똑같은 짓을 해도 옹호받는 것이다. 

 

내가 화났던 사실은  일반 남성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나 장애인, 아이까지 남자란 이유만으로 전혀 상관없는 일에 미러링의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다. 미러링은 심리학적으로는 무의식적으로 남의 행위를 따라 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 심리학 용어와 전혀 상관없이 여기서의 미러링은 남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모방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베가 하는 행동을 반사회적 행동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미러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따위 행위들은 미러링이든 뭐든 남녀불문 비난받아야 할 것이지 그 행동이 여자가 한다고 용납되는 건 아닌 것이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 회사에서 어떤 여직원이 날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는 모습을 한동안 보였었는데 그게 과장에게 화가 난 것을  나에게 미러링 한 것이었다. 과장은 매우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고 수직관계에 익숙한 남직원들과는 유대가 비교적 좋았지만 여직원들과 충돌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과장과 친해 보이는  나에게 미러링을 한 것. 

 

그러니까 과장이 여직원들한테 불쾌하게 행동하는데 과장에게 대들 용기는 없으므로 과장과 친해보이는 나를 괴롭혔던 것뿐인데 그저 저열한 행동일 뿐이다. 

 

상사의 불쾌한 행동에 분노했다면 상사에게 지적하거나 대항해야지 그 밑에 하위직원이 같은 남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건 그 상사와 똑같은 치사한 짓인 것이다. 난 과장에게도 여직원에게 관심도 없었고 회사를 때려치울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이걸 여성이 했다고 옹호할만한 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회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이러한 미러링 행동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비난하는 여성이 거의 없다는 점. 인터넷상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 그렇고 딱히 이런 행동을 비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부장적인 행동을 하는 과장은 비록 앞에서는 권위에 눌려 말을 못 하지만 뒤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데 정작 같은 행동에 대해서는 어떤 비난도 없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남자든 여자든 비난가능성은 같아야 한다. .&amp;amp;nbsp;

 

진보단체의 여성 정치인이라면 한 명쯤은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잘못된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남성 감독이 만든 영화나 페미니즘과 대립한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안 보거나 비난하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무조건 찬양한다. 

 

이 역시 매우 저열하고 유치한 행동일 뿐이다. 모든 영화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는 건 공산당이 만든 영화를 공산당원들이 보고 자유롭게 만든 영화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 영화를 그들끼리 돌려보고 즐긴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 정도에서 벗어나 단순히 하나의 관점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하거나 보이콧하는 것은 저열한 행동일 뿐이다. 

 

내가 어이없었던 때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개봉했을 때였는데 당시 왓챠의 영화평에 비난이 가득했다. 영화 개봉 전 배우 유아인이 레디컬 페미니스트들과 SNS상에서 논쟁을 벌였기 때문인데 , 매우 놀라운 사실은 배우 유아인은 굳이 페미니즘 스펙트럼을 나열해 보자면 무척이나 페미니스트에 가까운 포지션이었다는 점이다. 단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행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게시판에 영화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 정작 그 영화는 해외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극찬을 받았다. 페미니즘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인간과 젊은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진보적 역사학자 전우용은 미러링이라는 명목으로 남성 비하를 일삼는 메갈리아 워마드의 반사회성을 비판했는데 정작 이를 비판해야 할 여성학자들 중 누구도 비판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한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사회 전체의 평등을 꿈꾼다. 그들 중 누군가는 칼을 들어서라도 평등을 쟁취하려하고 누군가는 타협하려 하며 누군가는 사회전체의 의식을 개혁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포기한다. 그런데 이 단체에서 누군가는 칼을 들어 살인하는 이를 저지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도 살해하는 자를 막지 않고 오히려 두둔한다면 그 단체는 살인자들을 위한 단체가 되어버린다. 누군가는 나섰어야 했다. 

 

나는 섹스칼럼니스트 곽정은과 영화 평론가 듀나를 좋아했는데

이들도 비슷한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한다.  

 

곽정은은 케이블 채널에서 게스트에게  이 남자는 침대에서 어떨지 궁금하다는 얘기를 했다가 집중적으로 비난을 받았는데 

만약 여성 게스트에게 남자 패널이 이 여자 침대에서 어떨지 궁금하다는 얘기를 했다면 대중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그래 난 솔직히 그 말이 19금 케이블방송에서 할 법한 재밌는 농담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불쾌해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특히나 성적 농담을 일삼다가 망신을 당하거나 사회에서 매장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화평론가 듀나는 영화 낙서판이라는 영화 리뷰 사이트를 운영하고 무척이나 글을 잘 썼는데 이제는 아예 페미니즘 관점에서만 영화를 보는 듯하다. 누군가 자신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고 리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일 뿐이지만 오로지 한 이념의 관점에서만 영화를 바라본다는 건 정말이지 고루하고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내 여자 친구는 극단적이진 않지만 페미니즘 성향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난 이해하면서도 가끔씩 화가 날 때도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사건이 벌어져서 얘기를 하게 되면 나는 이런 사건이 있어서 안타깝다는 정도의 말을 하는데 여자 친구의 무의식적 분노가 눈앞에 있는 나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데

 

이봐... 난 약하다는 이유로 여자를 건드리기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못 죽여. 왜 그 분노가 나에게 향해야 하는 거야..

 

그렇다. 대부분 폭력적인 범죄의 가해자는 남성이지만 그만큼 그 폭력적인 범죄의 피해자도 남성이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기는커녕 자학이나 자위 자살로 그 폭력성과 분노를 해소하는 남자도 많다. 왜 그 소수의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를 일반 남성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도 억울하지 않을까.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남성들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러나 모든 남성이 이런 면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단지 페미니즘이니까 모든 남성에게 그 분노를 드러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유아적 발상이고 폭력일뿐이다. 

 

그러니까 모든남성을 적으로 둘 필요는 없다.. 나는 인간의 권리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먼저다. 남과 여를 떠나 한 개체로서 인간이 먼저다. 그리고 인권이 있고 개인의 권리가 있으며 이들이 연대해서 페미니즘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남자라는 이유로 한 개체로서 인간을 무시하고 한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면서 가해자에게 당한 두려움을 약자에게 보복함으로 되풀이한다면 그들이 그 가해자랑 다른 게 뭘까.

 

다른 글에서 썼었던 것 같은데 진보와 보수의 공통점에 대한 얘기였다. 어느 방면이든 극단으로 치달으면 동일한 점을 보인다. 소수의 이기심의 극대화. 결국 극단적인 페미니즘으러 이득을 보는 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자 일부일 뿐 선동된  평범한 남과 여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현실에서 여자들 전부 극단적 래디컬 페미니즘이지는 않다는 점을 말이다. 오히려 내가 현실에서 느낀 여성들은  대개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경우가 많았으며 오히려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성들 역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미친 극단적 꼴마초들은 잘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여러 가지 부조리한 관습들에 동조되어 있는 인물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소수의 목소리들을 좋아한다. 내가 살면서 소수라고 느낄 때도 꽤 있었고 그런 소수의 목소리들이 사회의 다양성을 지켜내고 건강하게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을 즐긴다.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를 상대하려면 그들보다 더 성숙해야 한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 인권운동이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다수의 편견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성숙하고 단단했던 이념때문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양성평등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이다.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여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회가 아직은 남성위주로 돌아가고 있고 그 부조리함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나 역시 그 사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부조리한 사회의 가해자는 극소수이고 모두가 함께 피해자일 뿐이다. 남성을 변호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남성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좀 더 발전하길 희망한다. 페미니즘이. 그때까지 계속 응원을 할 것이다. 그래봤자 이렇게 속으로만 하겠지만... 더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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